동태후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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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태후는 후한 영제의 어머니로, 하간군 출신이다. 남편 유창 사후 아들 유굉이 황제가 되면서 신원귀인으로 봉해졌고, 이후 효인황후로 존경받았다. 두태후 사후 국정에 관여하며 매관매직을 장려하여 한나라 부패를 심화시켰다. 유협을 황태자로 세우려 하였으나, 영제 사후 유변이 즉위하면서 태황태후가 되었다. 권력 투쟁 끝에 조카 동중이 하진에 의해 자살하고, 동태후는 충격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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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태후 (후한) | |
---|---|
인물 정보 | |
이름 | 동태후 (董太后) / 효인동황후 (孝仁董皇后) |
다른 이름 | 동태황태후 (董太皇太后) |
로마자 표기 | Dong Taihou / Dong Taehwangtaehu |
출생 정보 | 알 수 없음 |
사망 정보 | 189년 7월 7일 |
배우자 | 유창 |
자녀 | 영제 |
재위 정보 | |
칭호 | 황태후 |
재위 시작 | 169년 4월 17일 |
재위 종료 | 189년 5월 13일 |
선임자 | (선례 없음) |
후임자 | 하황후 |
칭호 | 태황태후 |
재위 시작 | 189년 5월 15일 |
재위 종료 | 189년 7월 7일 |
사후 정보 | |
시호 | 효인황후 (孝仁皇后) |
2. 생애
156년 해독정후 유장(劉萇)의 아내로서 유굉을 낳았다. 168년 유장이 사망하자 아들 유굉이 해독정후를 이었고, 같은 해 1월 25일 환제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환제의 황후 환사황후 두씨가 두무(竇武)와 함께 유굉을 황제의 후계자로 지목하여 황제가 되었다. 영제는 아버지 유장을 효인황(孝仁皇)으로 추존하고 묘를 신릉(慎陵)이라 하였으며, 어머니 동씨를 신원귀인(慎園貴人)에 봉했다.[4] 169년 효인황후(孝仁皇后)로 격상되었고,[5] 그녀의 오빠 동총(董寵)은 집금오(執金吾)에 임명되었다.[6]
172년 황태후 두묘가 붕어하면서 황태후가 되었다. 동태후는 아들 영제에게 매관매직을 크게 장려했는데, 이는 한나라에 큰 해를 끼쳤다. 181년 영제의 둘째 아들 유협(劉協)이 왕미인에게서 태어나자, 영제의 황후 하황후가 왕미인을 독살했다. 동태후는 유협을 직접 길렀으며, 유변 대신 유협을 황태자로 세우려 하여 하태후와 사이가 나빠졌다.
189년 4월 영제가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고 사망하자 유변이 즉위하고 하태후가 섭정을 시작했다. 태황태후가 된 동태후는 조카 동중과 함께 궁궐 내에서 세력을 만들고 하태후와 갈등했다. 결국 동중은 실각하고 자살했으며, 같은 해 6월 동태후는 갑자기 사망했다. 이 때문에 동태후가 하태후에게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2. 1. 초기
해독정후 유장(劉萇)의 아내로, 156년에 유굉을 낳았다. 남편은 귀족이었지만, 호화로운 생활을 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8년 유장이 사망하자 아들 유굉이 해독정후를 이어받았다. 동태후는 하간군(河間郡; 현재의 창저우, 허베이성) 출신으로, 장제의 6남 유개의 증손자인 유창(제독정후)의 아내였다.[2]2. 2. 황태후 시절
168년 1월 25일에 환제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환제의 황후인 환사황후 두씨가 아버지인 두무(竇武)와 함께 유굉을 환제의 후계자로 지목했다. 168년에 12살의 유굉이 황제(영제)가 되었고, 두씨는 두태후(竇太后)가 되었다. 영제는 할아버지 유숙(劉淑)을 효원황(孝元皇)으로, 그 부인 하씨(夏氏)를 효원황후(孝元皇后)로 추존했다. 아버지 유장을 효인황(孝仁皇)으로 추존하고, 그의 묘를 신릉(慎陵)이라 이름지었으며 어머니인 동씨를 진원귀인(慎園貴人)에 봉했다.[4]169년 영제는 시종들을 하간군에서 낙양의 영락궁(永樂宮)으로 모셔왔다. 그는 또한 169년 4월 17일에 그녀를 효인황후(孝仁皇后)로 존경했으며,[5] 그의 어머니의 맏형인 동총(董寵)을 집금오(執金吾)로 임명했다. 동총은 나중에 동태후의 명령을 받고 행동했다고 거짓말을 한 혐의로 투옥되었고 감옥에서 사망했다.[6]
168년 9월에는 중상시 조절이 태부 진번, 대장군 두무, 상서렁 윤훈(尹勳), 시중 유유(劉瑜), 둔기교위(屯騎校尉) 풍술(馮述)을 죽였다. 두무가 환관들을 몰아내려다가 오히려 환관들에게 죽음을 당하고 가족들이 유배당하자, 169년 영제는 어머니를 궁궐로 불러들이고, 외삼촌인 동총도 서울로 불러들였다. 동씨는 입궁 후 효인황후(孝仁皇后)라 불리게 되었고, 남궁(南宮)인 가덕전(嘉德殿)에 살았는데, 그곳이 영락궁(永樂宮)이라고도 불리었으므로, 사서에 따라서는 동씨를 영락태후(永樂太后)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총은 집금오(執金吾)가 되었는데, 170년에 죽었다.
영제는 두태후(환사황후) 또한 태후로써 모셨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태후가 죽자 동태후는 태후로서의 위치가 견고해졌고 점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희평 원년(172년)에 황태후 두묘가 붕어하고 황태후가 되었다. 동태후는 아들 영제에게 매관매직을 크게 장려했는데 이것은 한나라에 큰 해를 입히게 되었다. 동태후는 조정의 정사에 간섭하고, 매관매직으로 사복을 채웠다.
181년에 영제의 둘째아들 유협(劉協)이 왕미인에 의해 태어나자, 영제의 황후 하황후가 왕미인을 독살해 죽였다. 동태후는 유협을 직접 길렀으며, 그로 인해 유협은 동후(董侯)라고 불리었다.[14] 한편, 왕미인의 유복자인 손자 유협 (후의 헌제)을 양육했다. 동태후는 영제와 하황후의 적자 유변을 제쳐두고 유협의 입태자를 원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유변의 어머니인 하태후와 사이가 나빠졌다.
188년에는 조카 동중(董重)을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만들고, 천여 명을 거느리게 하였다.[7]
동태후는 유변보다는 유협을 더 좋아해서 영제에게 황태자 자리를 유변에서 유협으로 바꾸라고 말하였고, 이것 때문에 유변의 어머니인 하황후 사이에 큰 갈등이 발생했다.
2. 3. 태황태후 시절
189년 4월경, 아들 영제가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고 죽자, 영제가 신임하던 환관 건석은 유협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하황후와 대장군 하진은 유변을 황제로 옹립했다. 하태후와 하진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태황태후가 된 동태후는 조카 동중과 함께 궁궐 내에서 작은 세력을 만들고 하태후와 갈등했다. 동태후는 하태후와 말싸움을 하던 중 동중을 시켜 하진을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11]하진은 이 말을 듣고 먼저 하태후에게 태황태후를 원래 살던 영지로 유배시키도록 하고, 군대를 이끌고 동중의 진영을 포위했다. 동중은 자살했고, 태황태후도 뒤이어 죽었다. 태황태후는 자살했다는 설과 두려움 때문에 죽었다는 설이 있다.[11]
10월경, 동탁(동태후와 성은 같지만 아무런 관련이 없다)이 유변을 폐하고 유협을 황제로 옹립하면서, 유협을 황제로 즉위시키고자 했던 태황태후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협은 동탁, 왕윤 등에게 휘둘려 평생 황제로서의 실권을 쥐지 못했다.[11]
3. 평가
동태후는 조카 동중과 함께 조정의 정사에 간섭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아 자신의 사욕을 채웠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13] 또한, 하황후와의 권력 다툼 과정에서 유변을 제치고 유협을 후계자로 세우려 한 점도 비판받는다.[13] 이러한 권력 다툼은 결국 하진과 동중의 대립, 동중의 자살, 그리고 동태후의 급사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13]
4. 기타
참조
[1]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189-07-07
[2]
서적
Houhanshu
[3]
서적
Houhanshu
[4]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168-04-25
[5]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169-04-17
[6]
서적
Houhanshu
[7]
서적
Houhanshu
[8]
서적
Houhanshu
[9]
서적
Houhanshu
[10]
서적
Houhanshu
[11]
서적
Houhanshu
[12]
서적
Houhanshu
[13]
서적
三国志
[14]
문서
유협과 영제의 또다른 아들 유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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